한 장의 사진이 경영자들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방에 올라왔다. 남 여 학생들이 넓은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는 장면이었다. 선수들은 뛰고 있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으며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서는 코치들이 걱정스럽게 한 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카카오톡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여기는 필라델피아 한 교외의 고등학교 체육 시간입니다. 축구를 하다가 한 학생이 넘어지니까 운동하던 모든 학생들이 바로 그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코치들이 넘어진 학생을 상태를 체크하고 문제가 없다고 할 때까지 경기는 중단되고, 넘어졌던 학생이 일어날 때 모두가 박수를 쳐 줍니다. 그리고 다시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기기 위한 경기에 익숙한 우리의 체육활동 문화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가 아닌 고등학교 체육 수업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 새롭다. 게다가 일본이나 동양 문화권이 아니라 전형적인 미국의 한 고등학교의 체육 시간이다.
선진국일수록 스포츠를 교양으로 이해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한 두가지의 스포츠에 대해서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나라도 70년대 엘리트 스포츠 시대를 지나 지금은 국민체육의 시대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이제는 올림픽에 나가거나 세계 대회에 나가서 ‘국위를 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충분히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중고등학교 현실을 그렇지 않다.
대입을 과제로 두고 있는 중고등학교에서 체육수업이 줄고, 그나마 있는 시간 조차도 제대로 운영하지 않고 국영수로 대체되는 현실이다. 스포츠를 즐기는 현장을 가 보면 장년층이나 노년 층, 그리고 유아들을 많이 발견한다. 하지만 청소년을 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체육을 가르치는 현장에서도 경기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 대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경쟁에 민감하게 되고 선진 시민으로서의 교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소리처럼 들리게 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경쟁을 통해서 최선을 배우는 스포츠 경기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배우고 시민으로서의 교양을 배울 수는 없을 것일까? 경쟁 속에서 배려를 배우게 하는 미국의 한 고등학교 체육 코치의 수업 방식에서 부러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