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ISM)’은 지배적인 세계관을 의미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세계관이고 집단주의는 집단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주의라는 말 앞에 ‘제일’이라는 말을 넣어서 읽으면 쉽게 이해된다. ‘자본주의’는 자본제일주의이다. ‘가치주의’ 역시 가치제일주의를 말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가치주의는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람도 '자본'으로 보는 것이다. (출처: Pexels)


자본주의는 사람도 ‘자본’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은 넓은 의미에서 교환 가능한 모든 재화를 말한다. 피조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교환 가능한 기준으로 환산하여 자본으로 측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달의 부동산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볼 수 있다. 가치를 자본화하여 평가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핵심 자본인 ‘돈’을 중심으로 해서 서술하자면, 화폐가 가진 기능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본의 첫 번째 기능은 교환매개체이다. 자본은 교환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전에 물물교환을 하던 불편함을 해결해 주었다. 옷을 만들던 사람은 신발이 필요할 때 옷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이 가진 돈을 가지고 원하는 신발을 사면 된다. 돈은 교환을 가능하게 한다. 교환은 등가가 성립할 때 거래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본은 가치를 매몰하고 교환매개체가 된다.
 

등가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출처: 브런치)


둘째는 가치의 척도기능이다. 서로가 무엇인가를 교환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자본에 대한 측정과 관리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돈은 물건에 대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 원래 100g의 옥수수와 100g의 밀은 상호 상대적 평가를 할 수 없이 ‘존재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교환의 필요에 따라 돈은 가치의 척도가 되고 상호 평가가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내가 10,000원을 가지고 있다면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결혼정보회사는 사회적 스펙을 평가해 신랑감, 신붓감에 대한 상대적 서열을 만들어 발표한다.

돈의 세 번째 기능은 가치의 저장이다. 돈은 가치를 저장하는 기능을 한다. 생선 한 마리의 가치가 1년을 갈 수 없지만 그것을 돈으로 교환하여 가지고 있으면 비교적 장기간 동일한 가치를 저장하고 있을 수 있다. 돈에 이런 저장 기능이 있어서 저축이나 축적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수단인가, 목적인가? (출처: Pixabay)


경영자는 인간자본, 혹은 인적 자본을 관리하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조직의 사람들이 가진 무형의 가치를 자본으로 인식하여 관리할 때 인건비 중심의 인재관리에서 벗어나 조직 구성원들의 역량이나 조직 시너지에 대한 자산화가 가능해지고 그 자체가 기업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인간관은 개개의 인간을 등가로 보지 않고 일 당 백, 혹은 일당 만이라는 말을 만들고, 한 명의 인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어느 재벌그룹의 총수의 일화도 있다. 자본주의적 인간관은 각 사람의 고유한 재능과 역량을 끌어내어 최대한의 성과에 기여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비용중심 인간관보다 진일보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인간을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은 결국 인간을 수단화하고 최상위에 존재해야 할 인간 자체를 무엇인가 달성해야 하는 수단으로 보는 잘못을 범할 우려가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 아래에 있는 최상위의 가치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본으로 바라 보아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자본이지 인간이 그 무엇을 위한 자본이 아니다.
 

바른 경영으로 바른 열매를 맺는 '가인지경영' (출처: Pexels)


바른 경영을 통해 바른 열매를 맺고자 하는 노력

바른 경영, 성경적 경영을 실천해가는 방법론으로 내가 제시하는 것은 가치경영, 인재경영, 지식경영이다. 가치경영은 이웃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고객가치를 목적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인재경영은 사람을 성장시켜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다. 지식경영은 운과 부정한 방법이 아닌 정직과 탁월함, 즉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과를 내는 것이다.

가치주의는 사람을 ‘자본’으로 환산하지 않고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가치는 대상이 갖는 고유한 속성이다. 가치는 상호 비교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갖는 고유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가치주의는 대상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교환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한 시간에 6,000원의 노동은 정말 6,000원짜리인가, 10,000원 하는 티셔츠는 정말 10,000원짜리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대상에 대하여 값을 메긴다. 교환가치로 환산하여 대상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교환이 우선적 가치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연봉이 5,000만원인 홍길동 과장은 5,000만원짜리 사람이 아니라 그냥 홍길동이다.
 

사람은 얼마짜리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다. (출처: Pixabay)


회복해야 할 옛 가치

간디는 7가지 사회적 대죄가 있다고 말했다. 그 중 노동 없는 부, 도덕 없는 상업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비즈니스계에 있는 경영자들에게 큰 통찰을 준다. 비즈니스 필드를 이끌어 가고 있는 핵심 엔진이 시장인데 지금은 이 시장의 기능이 우상이 되어 오히려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야 할 인간 위에 존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바름과 틀림을 따지기에 앞서 이익과 손해라는 프레임 속에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름의 논리보다 시장의 논리가 더 상위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바른 것이 옳은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는 ‘남이 너를 무시하는 것을 참지 말아라’, ‘받은 만큼 돌려주어라’, ‘공짜는 없다’, ‘대우 받아라’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자녀들에게 ‘참고 돌보아라’, ‘받으려 하지 말고 주라’, ‘낮아지고 섬기며 사랑하라’ 라고 말한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출처: Pexels)


비즈니스에서는 끊임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하고, 필요한 것은 당장 가지라고 말한다. 자기 중심적인 인본주의 세계관에서 공동체적인 자신이 아닌 자기 도취의 문화로서 내가 특별하기 때문에 나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부추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희생보다는 자기애를 이야기하고, 이타성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는 활동에 정당성을 제공한다. 이런 세계관에서 비즈니스에 의한 이웃사랑의 원칙을 실천하기 어렵다. 게다가 대부분의 비즈니스 메시지는 ‘당장 그것을 가지라’고 이야기 한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을 품게 되며 시장의 가치를 위해서 사회적 비용을 희생한다. 에너지 드링크나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이나 타우린은 결국 우리 몸에 미래 에너지를 현재로 당겨다 사용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나는 소중하다. 내가 원하는 것도 소중하다. 그런데 지금 당장 갖고 싶다.’로 요약되는 비즈니스의 세속적 가치는 우리를 점점 자본중심 사회로 이끌어 간다.
 

바른 욕구(Desire)인가? (출처: Flickr)


욕구의 바름을 이야기 할 때이다.

비즈니스 필드에는 회복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나는 소중하다. 내가 원하는 것도 소중하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질 것이다.’는 주장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다. 비즈니스는 끊임없이 고객의 욕구를 자극하고 불러 일으킨다. 기업의 핵심기능을 ‘마케팅’과 ‘혁신’이라고 하듯이 기업은 끊임없이 욕구를 자극하고 새로운 니즈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본질이다. 비즈니스의 핵심 기능은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다. 기업이 자극하고 만들어 내는 욕구와 니즈가 얼마나 인간 사회에 공헌적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고 달리는 것은 마치 폭주기관차가 끝이 있는 레일을 달리는 것처럼 위험하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을 이해할 때도 그 사람의 욕구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욕구 이론은 매우 중요한 심리학의 관심사이다. 욕구가 무엇이냐에 따라 유형을 분류하기도 하고 욕구 충족에 대한 위계를 만들어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욕구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은 그 욕구의 기원(Origin)에 대한 성찰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른 욕구인가에 관한 성찰이 없이 게임중독이나 알코올 중독, 혹은 수집 중독 등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다루기 어렵다. 욕구 이론에 근거한 성향 분류 연구 역시 지나치게 자아 중심적이고 욕구 충족을 위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공헌 중심적인 삶을 사는데 제약을 준다. 또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어!’라고 하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우를 범한다. 나는 오래 전에 어떤 성격 유형전문가로부터 ‘예수님은 아마 ㅇㅇ유형이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는 매우 부적절한 관점이다. 전인격적인 롤 모델인 예수님이 어느 한 유형에 속해 있다고 치부될 수 있겠는가!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출처: MaxPixel)


‘나는 그것을 원해!’가 아닌 ‘그만하면 충분하다!’

우리에게는 ‘그만하면 충분하다.’의 가치가 필요하다. 정말 그만하면 충분하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소비를 누리고 있다. 과시적 소비와 자기연민적 소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아직도 전세계 인구의 50% 이상은 굶주리고 있다. 우리가 먹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누리는 것의 상당부분은 사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원해서이다. 하지만 그만하면 충분하다. 검소함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검소함이란 모두가 하향 평준화가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조금은 낮추어 소비하는 것이다. 그 차이만큼 내적인 만족이 있을 것이다. 검소한 것과 가난한 것은 차이가 있다. 자녀의 운동화 밑창에 본드를 붙여 주면서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검소한 것이다. 반대로 마트에서 과일을 고를 때 싼 것을 찾을 때도 아껴서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느냐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느냐 그 마음이 다를 것이다. 결국 검소함과 가난함은 처한 사람의 태도와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자기연민, 과시적 소비의 뿌리 '비교의식' (출처: Pixabay)


자기연민적 소비나 과시적 소비는 드러나는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상 하나의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비교의식’이다.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당신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소비자로서 우리의 답은 두 가지이다. ‘그래, 내게는 그것이 필요해!’라고 하든지 ‘아니야, 이만하면 충분해!’ 둘 중에 하나이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소비를 할 때 주변 사람과 비교한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야 하고,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만족한다. 비교의식은 끊임없는 욕구를 창출하고 그 욕구는 또 다른 비교의식을 부추긴다.

식사 한 끼를 먹을 때 맛있으면 되었으나 지금은 주변 분위기가 좋아야 하고, 직원들의 서비스도 수준이 있어야 하며, 들리는 음악이나 느껴지는 공기도 좋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식사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의 절반이 넘은 인구가 배고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 거리를 편하게 이동할 수 있으면 되었던 교통수단은 보다 편리해졌고, 편안해졌으며, 공간의 쾌적함을 추구하고 있다. 자동차는 보다 대형화되어 가고 있고 외부에서 보는 이미지를 고려해 디자인적 가치가 증가하고 있다. 나의 편의성뿐 아니라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에 대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 학생의 70%가 넘는 인구가 1시간 이상을 걸어서 학교에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마저도 못하는 아동이 얼마나 많은가!)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할 수는 없을까? (출처: Pixabay)


하지만 공정(Fair)과 공평(Equal)은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욕구를 동일시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최소한의 소비 수준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각 사람은 각자 고유한 욕구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수준에서 조그만 낮춰서 소비수준을 설정한다면 그 격차가 자부심이 되지는 않을까? 제네시스를 탈 수준이 되는 사람은 그랜저를 타는 것으로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할 수는 없을까? 50평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40평 아파트에서 살면서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소비자로서 우리는 자신의 욕구가 과시적 자기연민적 소비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한다.

공급자로서 우리는 소비자들에게 상대적 비교를 부추기는 광고와 마케팅적 컨셉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가치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놀이공원을 운영하는 경영자라면 고객들이 충분한 쉼을 가진 후에 자신의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일상을 버리고 놀이공원에서만 머무르도록 하는 마케팅을 펼친다면 결국 그의 삶을 중독의 문제로 이끌게 될 것이다. 헬스장을 운영하는 경영자라면 회원들이 적절한 수준에서 자신의 몸을 관리하고 삶을 유지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전문 지식을 무기로 의존적이며 지속적인 비용이 지출되도록 교묘한 수단으로 메어 두어서는 안된다. 학습지 선생님이라면 아이의 수준과 성향을 고려해서 적절한 수준의 학습 목표와 교재를 제안해야 한다. 과도한 학습 프로그램으로 사교육비가 지출되게 유혹해서는 안된다. 특히 병원의 경우 환자의 상태를 보아 적절하고도 최소한의 선에서 치료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운영해야 한다. 불필요한 진단과 치료를 환자에게 치명적이며 비윤리적이다.
 

회복해야 할 옛 가치는 무엇인가? (출처: Pixabay)


‘욕구는 선하다’라는 가치에서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가치로 전환하는 것은 비즈니스에서 공급자이자 소비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기초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끊임없이 욕구를 창출하고 소비를 만들어내는 산업 현장에서 어쩌면 너무 이상적인 외침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불리를 떠나 옳다면 주장하는 것이 바른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짐 월리스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가장 큰 변화와 교훈은 우리가 간직한 가장 근원적이며 오랜 가치 안에 있다.” 고 말한다. 회복해야 할 옛 가치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다. 재정적 안정은 주관적 느낌일 뿐이다. 둘째, ‘우리는 한 배를 탔다’ 이다. 이웃에게 좋은 일은 대개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다. 이웃과 경쟁자, 경쟁사나 산업구조 속에서 한 배에 탔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셋째,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다. 이웃을 섬기고 지구를 보존하는 것, 미래를 위해 어떤 지도자를 길러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세속적 비즈니스 가치 속에서 회복해야 할 옛 가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즈니스에서 회복해야 할 근본적 변화는? (출처: Pixabay)


비즈니스에서 회복해야 할 근본적 변화의 중심

시장은 본질적으로 가치보다 가격을 더 우선한다.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도덕)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원하는 것에 대한 자극과 충족의 논리(시장)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인간을 있는 그 자체로 여기는 가치가 확산되어야 한다. 가정을 보다 소중히 여기고 자녀의 양육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부모에게 다시 돌려 주어야 한다. 부부는 다시 상호 헌신적인 평생의 동반자로 여기는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바른 욕구에 대하여 적절한 가격으로 교환하는 교환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공급자로서 우리는 생산과 유통 과정에 있는 협력자들과 합리적인 거래를 회복해야 한다. 소비자로서 우리는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경영자로서 직원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협력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해야 하며, 직원도 경영자의 동반자로서 함께 해야 한다. 직장은 단순히 노동을 제공하고 보상을 받는 작업장이 아닌 전인격적인 삶을 나누는 일터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피조 세계에 대하여 이 세대 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용 할 뿐 아니라 보존해 주어야 한다.

이런 가치가 중요시하면 매출이 오르고 수익이 오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조직 내에 가정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을 중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해외 원조를 하면 결국 우리 나라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후원하고 자원봉사 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가치주의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대하는가? (출처: Pexels)


얼마 전 모 결혼정보회사에서 신랑과 신부 등급을 발표했는데 1등급부터 15등급까지 있다. 15등급에도 안 들어가는 사람은 ‘무등급’이다. 우스겟소리로 넘겨 들을 수 만은 없는 현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모든 것에 값을 메긴다. 어느 스포츠 스타의 연봉이 얼마라는 이야기, 어느 배우의 영화 출연료가 얼마라는 이야기,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얼마라는 이야기, 어느 스포츠카의 가격이 얼마라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우리들의 삶을 소외시키는가 돌아 보아야 할 때이다. 조직에서도 경영자는 은연 중에 각 직원들의 연봉을 떠올리고 그 만큼의 성과를 내고 있는지 판단한다. 고객을 만날 때도 나에게 어느 정도의 매출을 올려 주느냐에 따라 쏟는 에너지의 경중을 정하곤 한다. 이런 모든 생각들은 자본주의적 비즈니스 필드에 있는 우리로서 피하기 어려운 시험들이다. 하지만 가치주의는 교환 가치에 의해 작동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노력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값을 매기지 않고 그대로를 소중하게 여기고자 하는 노력이다. 값을 매기기 전에 먼저 있는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 해 주기 시작하려는 노력이다.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이런 가치주의가 증거되고자 하는 경영자를 응원하고 성공의 사례가 곳곳에서 들려 오기를 기대한다.

 

김경민 대표 (가인지캠퍼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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