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경영자는 어떻게 사람을 움직일까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들이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에
관한 책도 많이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무엇이 과연 나를 출근하게 만들고, 야근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까다로운 고객 앞에서 나를 고개 숙이게 하는가?
무엇이 거친 상사의 언사에도 묵묵히 수용하게 하는 것인가?

 

직장인학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들에게 "여러분은 현재 일을 열심히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90%이상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일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이에 관한 매우 기초적인 이론이 있다. 사람은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매슬로우는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표현했다. 그리고 하위의 신체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 욕구인 존중과 자아실현 같은 고차원적인 것들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마켓 3.0에서 필립 코틀러가 밝힌 것처럼 매슬로우 역시 ‘내가 그린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사람을 움직이는 힘에 관한 수많은 이론 중에서 주목할만한 이론은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공자는 성선설적인 입장을, 맹자는 성악설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현대 의학에서도 X이론과 Y이론이 상호 보완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성경에서도 우리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동시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 E그룹의 기획부로 입사했지만 IMF의 영향을 받아 식품 사업부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매일 매장으로 출근해서 배달하는 일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11시가 늘 넘었다. 눈 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다. 그리고 받는 월급은 내가 기대했던 수준의 1/3이었다. 그래도 맡은 일이니 최선을 다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새벽 별보기를 하며 집에 돌아오는 어느 날이었다. 조용한 골목길, 유니폼을 갈아 입지 못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구두 발소리를 들으며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가 진짜 이렇게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회사의 비전과 사명, 그리고 성장에 대한 답을 해 왔던 나였지만 의외로 내 마음 속 진실한 대답은 달랐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솔직한 대답이 들렸다.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가난하게 살지 말아야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되잖아!’, ‘지금 시작인데 이 경쟁에서 승리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어!’ 이런 솔직한 마음속 외침을 듣고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나를 이끌어 왔던 힘이 ‘두려움’이었다니……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불안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큰 에너지를 갖는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 역시 사람에게 큰 에너지를 준다. 때로는 그런 요인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이끄는데 매우 큰 효과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동기에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 결핍의 심리로는 사람의 창조성, 즉 하나님의 형상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저 원본을 따라 할 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이끌던 나의 신입사원 시절은 하루하루 일한다는 것 자체로 안도감이 있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두려움이라는 방법으로 짝퉁 리더십으로 이끌어 왔던 기간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했다.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일했다.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성과를 인정받아서 일년 반 만에 인사/교육 팀장으로 빠른 승진을 했다. 지금까지도 이례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을 만큼 괄목할 만한 일이었지만 하루하루 몰려드는 수많은 과제들도 그만큼 만만치 않았다. 주변으로부터 유망주, 핵심인재라는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패배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은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실무적으로 어떻게 일 하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보기도 하고 또 손해를 보기도 하는 상황에 내가 무겁게 느낀 것은 ‘책임감’이었다. 역할이 중요해진 만큼 영향을 크게 줄 수 있는 위치여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업무를 모두 해내지 못하면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되는 있는 포지션이었다. 당시에 내가 제일 많이 쓴 단어는 ‘Should be’, ‘Must be’였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 속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으로 마음이 묵직했다. 주변으로부터의 인정을 받으니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가득해졌지만 역시 행복하지는 않았다. 책임감은 일을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은 그 일을 수행해 낼 역량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어떻게든 완수 해 낸다. 그래서 리더는 맴버들에게 책임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어떤 일에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분명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내 경우를 비추어 볼 때 책임감은 결핍을 채우는요인이었지 풍요를 더하는 요인이 되지 못했다. 내 삶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멀어지자 그 자리를 자리 잡은 것은 책임감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일을 처리 해 내던 나의머릿속은 온통 내가 맡은 일을 완수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Do-List로 가득 찬 삶이었다. 하루 종일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집에 가기 전에도 ‘아내와 해야 할일 리스트’를 정리해서 퇴근을 하곤 했었다. 참으로 피곤한 하루 하루였다.

나는 원래부터 교육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교회에서 찬양팀, 행사팀, 진행팀등 이름은 달랐지만 주로 모임을 진행하고 레크레이션을 인도하거나 찬양을 인도하는 일을 했다. 수련회 오후 프로그램이나 야간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진행하고 참가자 평가서에서 1위를 차지하면 목에 힘 꽤나 주던 때가 있었다. 회사에 입사해서도 임원 분들을 만날 때마다 교육에 관한 관심을 이야기 하곤 했다. 내가 속한 조직의 본부에서 일하던 때이다. 감사하게도 그 기회가 왔다. 회사의 판매사원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우리 회사뿐 아니라 다른 크리스천 기업을 돕는 일을 비전으로 하는 법인을 시작한 것이다. 일의 시작을 위하여 소위 드림 팀이 구성되었고 그 일의 매니저를 맡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닌 사명과 비전을 수립하고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누구를 만나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명감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명과 비전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동역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뭔가 소명을 이루어간다는 기분에 행복하고 기뻤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인가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나의 매일의 기도는 ‘하나님, 제가 조금 더 잘하게 해주십시오!’와 같이 사명을 감당할 힘과 지혜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할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달라는 것이 주된 기도 제목이었다.

 

 

사명감은 강력한 리더십을 낳는다. 사명을 함께 하는 조직은 강력한 목적과 스피릿으로 함께 한다. 추진력과 협동심이 발휘된다. 또한 숭고한 헌신과 희생을 감수한다. 다른 사람을 향한 공헌과가치에 몰입한다. 그러므로 사명감으로 조직을 이끄는 사람은 무서울 것이 없다. 릭 워렌 목사님의 명저인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강력한 리더십에 관한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명을 함께 하는 조직을 만들수 있다면 그것은 리더십의 상위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TED강의와 저서로 유명한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인 사이먼 사이넥의 최근 저서인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에서 미 해병대의 식사 모습에서 사병들이 먼저 식사하고 나중에 장교들이식사를 하는 모습을 당연한 문화로 받아들이는 군대조직의 리더십에서 배울 점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부름’이라는 숭고한 가치에 동의한 조직이 바로 군대조직이므로 그런 강력한 리더십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군대처럼 거대한 조직이 특별한 가치관 교육 없이도 상명하복이 가능한 이유는 군인들 모두가 국가에 충성한다는 사명감 하나 때문 아닌가! –물론 그렇지 않은 군대도 있다. – 사명감이 나를 이끌고 있다면 하루하루가 그런 숭고한 가치를 향해 공헌한다는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신나게 사명과 비전을 수행하던 어느 여름 나는 혼자서 사명과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갖고자 오산리 기도원에 갔다. 기도굴에 앉아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누가복음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을 읽을 때였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 가져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다. 수 없이 읽어 왔던 성경 구절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는데 이것은 ‘사명’일까 ‘사랑’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태초부터 미래에 이르도록 예수님보다 사명이 더 중요한 삶을 산 사람은 없다. 33년을 오롯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살아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하신 말씀들을 읽으면서 이것은 사명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성경을 뒤로 넘겨 요한복음에는 더 한 말씀이 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절체절명의 사명 완수의 시간에 사사로이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예수님의 삶은 사명감에 의한 삶이 아니라 사랑의 삶이었다. 그는 제자를 사랑하셨고 무리를 사랑하셨으며 세상을 사랑하셨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다 보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일까?

최근에 ‘위플레시’라는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고 한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 음악을 하는가 아니면 음악을 사랑하다 보니 최고가 되어 있는 것인가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 위대한 성취에 우리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지만 진정한 삶의 진실은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1-3)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헌신적으로 우리를 보살피셨다. 과연 그 분들 께서는 자녀들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에 의해서 그렇게 사셨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셨던 것일까? 우리들의 부모가 자녀를 향한 것은 사명감이라기 보다는 사랑이었다. 나의 아내는 자녀들이 집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빨래를 해 주며 편안하게 집에서 쉬었다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도록 도와준다. 그 모습을 떠 올리면 나는 아내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아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리더를 키우기 위한 사명감으로 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이다. 나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산리 기도원의 작은 기도굴에서 회개하면서 행동을 반성했다. 사람을 만날 때 판단했던 일을 반성했다. 사명에 득이 되면 친구로 삼고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일도 반성했다. 뜻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해서 빠르게 멀리 했던 일도 반성했다. 사명과 비전을 위해 기도하러 갔던 그 날 나는 아무런 목표와 전략을 세우지 못하고 그저 회개하고 돌아 와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사랑은 가장 강력한 리더십이다. 아니 사랑은 리더십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이다. 나는 약 7년 교회의 목자가 되어 목장모임을 매 주 금요일 집에서 모이고있다. 이 목장모임에는 교회를 다니는 가정도 오고 다니지 않는 가정도 온다. 그들과 매 주 식사를 함께 하고 나누는 것이 기쁘다. 저녁 7시면 모이기 시작해서 11시가 넘어야 끝난다.

매 주 금요일에 하는 목장모임 외에도 나는 종종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컨설팅이나 교육을 마무리 할 때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 교제를 나누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나의 아내는 1년에 손님을 70번 정도 치른다. 일 년에 한 두 번 손님을 초대하는 것은 어렵지만 70번 하는 것은 쉽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아내가 옆에 있을 때만 한다. 얼마 전 몸이 좋지 않아 고생하면서도 손님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던 아내에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해! 좀돌아가면서 식사하고 쉬기도 해야지 공평한 거아니야?” 그 말을 들은 아내가 이렇게 답했다. “공평하면 힘이 없잖아요. 아직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아내의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진정한 리더십은 사랑과 섬김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진정한 리더십은 사랑의 불공평함에서 나온다. 가장 불공평한 사랑을 행하신 분은 예수님이다. 그 분은 그렇게 안 해도 되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하셨다. 그래서 너무너무 불공평하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다. 나도 불공평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 그런데 본성적으로 교만함으로 가득한 나 자신은 섬김을 받는 데는 빠르고 섬기는데 느리다.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과 섬김만이 유일한 리더십이된다는 것을!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0-31)


지금 나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직원들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사람은 결국 이 네 가지의 동기로 인해서 움직인다. 두려움, 책임감, 사명감, 사랑이다. 나를 움직이는 동기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촉진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경영자는 직원들을 대할 때 위의 네 가지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으로 움직일 수있게 될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회사를 구성하는 직원들이 ‘사랑’으로 일하기를 원한다면 경영자가 먼저 동일하게 직원을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절체절명의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그 일을 사명으로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다 보니 결국 사명이 완수된 것이다.
우리의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고객을 사랑하다 보면 사명이 완수된다. 우리 모두가 그런 축복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사랑이 이끄는 삶이 되고 싶다.
나의 일터는 여전히 두려움과 책임감, 사명감, 그리고 사랑이 공존한다. 때로는 현존하는 급박한 위협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때로눈 정말 하기 싫은 일을 책임감 때문에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서는 비전과 사명을 외치기도 한다. 얼마전에 함께 하는 맴버의 작은 실수로 큰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몇 일을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내 마음은 마치 바닥에 황토 흙이 깔린 투명 어항과도 같다. 언제라도 누군가 막대기를 집어 넣고 흔들면 어항 전체가 흙탕물이 되어 버린다. 두려움과 불안함에 사로 잡히게 게 된다. 하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곧에서 한가지 희망이 있다. 그것은 '지금 함께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이생과 내생에 공통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닌 사랑이 이끄는 삶을 살고 싶다. 나와 함께 하는 맴버들도 그렇게 살도록 돕고 싶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세상에 내려온 천사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경험한 후에 고백하는 대사는 경영을 하는 우리에게도 사람을 어떤 존재로 대해야하고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일해야 하는지 좋은 교훈을 준다. 톨스토이의 깨달음이 오늘따라 더욱 깊이 다가온다.

 

"아! 나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내려주시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도록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번에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뿔뿔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계시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로 뭉쳐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인간을 자신을 위해서, 또 모든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나는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정말은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글. 김경민 (바른경영실천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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