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

퇴직 후 첫 직장에 출근을 했다.   수술 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아랫배에 통증이 있었지만 견딜 만했다.          

내가 출근한 곳은 강남 모 학원이다. 말로는 상담실장이라지만 학원에 오는 고객 문의 전화를 받고, 예약을 잡아 학원 등록을 위한 커리큘럼 안내를 하며, 청소와 비품 관리, 블로그 작성의 일등을 하는 말 그대로 그저 상담 데스크 직원이다.           

오래간만에 작성한 근로계약서의 제목은 '시간제 근로자 계약서'이다. 나의 급여는 국가가 정한 최저시급 수준이고, 계약서에는 내가 학원을 다니며 해야 하는 일 총 25가지, 하면 안 되는 일 총 20가지가 빼곡히 적혀있다. 퇴직 전 마지막으로 작성했던 임원 계약서보다도 많은 분량이다. 맨 하단에 사인하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직업에 귀천이 어딨어?

여기서는 건강만 회복하면 돼

나 자신을 다독였지만,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시작은 일주일 전 면접 강사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본, 모 학원의 전임 강사 전화에서 비롯되었다. 학원에서 강의는 물론 내부 살림을 도맡아 하는 부원장급 사람이었다. "면접 강의 준비는 잘하시고 계시죠? 수업이 언제 배정될지 모르니 준비 잘하시고요. 그리고 혹시 저희 상담 데스크 직원이 갑자기 나가게 돼서 그러는데, 근무하실 수 있으세요?"      

뜻밖의 제안에 당황했다. 갑자기 나가게 된 데스크 직원이라면, 내가 강사 면접을 볼 때 급한 일이 생겼다며 약속 직전에 펑크를 낸 대표를 대신하여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던 그 직원인 듯하다. "상담 데스크요?" 나도 모르게 말이 나가는 순간 대형 판매시설의 고객센터가 생각났다. "네. 하루에 6시간 교대로 근무하실 거고요. 괜찮으시면 다음 주부터 나오시면 되세요”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일정을 잡는 것을 보니 꽤나 급한 모양이었다. “네. 생각해 보고 내일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렇게 학원으로 첫 출근을 하였다.  두 달 전 하복부에 큰 수술을 마치고 누워만 지내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나에겐 규칙적인 일상이 필요했다. 탄탄하던 하체 근육이 흐물 해지고 뱃 힘이 약해져 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삶의 방향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학원이 퇴직 후 나의 첫 직장이 되는 것이 마음이 걸렸지만, 건강 회복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싸워야 했던 것은 나의 자존심이었다.  ‘꼭 학원에 출근해야만 건강이 회복되는 거는 아니잖아’ ‘대기업 임원 출신이 계약직 상담원을 한다고? 회사가 알면 뭐라 그러겠어?’  시니컬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퇴직 후 1년 여가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회사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모습이 우스웠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웠다. 어쩌면 건강은 핑계이고, 오랫동안 혼자 지내며 우울감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리웠던 것일 수 있다. 더 깊이 떨어지기 전에 절벽의 나뭇가지라도 잡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선택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첫 출근의 점수는 나쁘지 않다. 일찍 집을 나선 덕에 20분 전에 여유 있게 도착했고, 고객의 첫 문의 전화도 상호명 실수 없이 받았으며, 하루에 해야 하는 일도 모두 했다. 대표에게 일일 업무를 문자로 전송하고 마지막으로 강의실과 화장실 쓰레기통 휴지를 모두 모아 외부 쓰레기장에 버리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퇴직 전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며 보란 듯이 성공하리라 다짐했었는데, 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회사에서 내가 이룬 성과는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회사의 탄탄한 조직력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어 자신감도 잃었다. 나의 앞날이 전혀 예측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의 출발이 회사 밖 세상과의 마중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여러 대 놓쳤다. 버스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멈추어 주지 않았다. 간만의 외출을 하는 나에게 결코 친절한 모습이 아니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도 이러할 것이다. 세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기에 내가 힘을 내어야 한다.     

매캐한 연기가 느껴졌다. 일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세상을 향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나 보다.  

*본 기사는 사례뉴스 필진기자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 정경아 저자가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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