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여 남을 돕고 남을 위하여 나를 챙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누이는 나에게 한 마디를 했다. 너는 참 에고이스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기주의자가 되었다. 집안에서 가장 똑똑하고 아는 게 많은 누이가 한 말이니 그것은 진실이고 맞는 말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을 보니 누이가 한 말은 나에게 주홍글씨로 박혀 버린 듯하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신문을 볼 때에 흡연이 인간 삶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만 골라 본다. 굳이 골라서 찾아보지 않아도 그러한 내용은 눈에 바로 들어오고 읽게 된다.

예를 들어 흡연은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좋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흡연이 더 좋다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애주가는 술이 건강에 좋다는 내용만 보이고 커피를 즐기는 사람은 커피가 심장질환에 좋다는 기사만 눈에 들어온다.

나도 신문을 보면서 이기주의자가 이타주의자보다 좋다는 기사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기주의자는 흡연이나 음주 커피보다 더 안 좋은 가 보다.

이 사회에서 이기주의자는 악이지 절대로 선이 될 수 없다. 어디에서도 이기주의자를 찬양하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 이기주의 예찬론을 펴보면 어떨까. 

이기(利己)란 이로울 이(利)에 자기 기(己)로 이루어진 글자로 자기를 이롭게 한다는 말이다. 이게 무엇이 잘 못 되었나. 문제는 이기(利己)를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기주의자가 악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만'에 있었다. 나는 '만'을 빼낸 '자기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이기주의자가 악이 아니라 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한다. 나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거 말이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 볼 내용이 '나는 누구인가'이다. 

우리는 수시로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르는데 머리카락이나 손톱은 내가 아닌가. 머리카락과 손톱은 너무 하찮아 보인다면 교통사고로 절단된 다리는 내가 아닌가.

이식 수술로 제거된 심장이나 간은 내가 아닌가. 과학이 발전하여 신체의 모든 장기를 교체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나는 무엇이 남는가. 

과학 저널 등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나는 나의 기억(추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기억은 빼내어 컴퓨터에 저장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저장된 기억을 복재할 수 있는 거는 당연하고 이렇게 복재된 기억을 로봇에게 이식하면 그 로봇이 내가 되는 건가? 여러 로봇에 나의 기억을 이식하면 나는 여럿이 될 수 있는가?

나는 나의 영역은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나의 신체에 가두어 있는 존재로 국한시킬 수도 있지만 그 영역을 넓힐 수도 있다. 그 영역을 넓혀 나가면 나의 가족도 내가 되고 내가 사는 사회도 내가 되고 더 나아가 이 지구 상의 모든 인류가 내가 될 수 있다.

이것을 더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지구 상의 인류만이 아니라 동식물과 지구 우주까지도 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각자의 능력 문제이다.

다시 내 몸으로 국한된 나로 돌아와 보자. 내 입이 너무도 원하여 폭식을 하면 위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고 다음은 혈관으로 뇌로 그 문제는 이어지게 된다.

내 입의 과욕으로 나의 다른 장기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 내 다리가 게을러 움직이지 않으면 나의 다른 장기들은 순환이 되지 않아 질병을 앓게 된다. 심장이 모든 혈액을 독차지하려고 펌프질을 하지 않으면 내 안의 다른 장기들은 모두 죽게 된다. 

나로 인해 나의 다른 장기가 손상을 받고 죽게 되면 결국은 나만을 위해 활동하려 했던 장기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욕심을 부리려 했던 장기도 자신을 위해서 다른 장기들을 도와 협조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도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내 안의 여러 개체는 서로 함께 작용하며 나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거는 아무것도 없다. 나를 위하여 남을 도와야 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나의 몸을 벗어나서 확장된 나의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사는 사회에서도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며 모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나의 과욕으로 누군가는 곤혹을 치를 수가 있고 나의 게으름으로 누군가는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부담의 결과는 곧 나에게 미쳐서 나를 위태롭게 한다. 

누군가는 순수하게 남의 처지가 안타까워 측은지심으로 남을 돕는다. 흔히 이야기하는 이타주의자의 행동이다. 현명한 이기주의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사고는 다르더라도 행동은 이타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다. 현명한 이기주의자는 나를 위하여 남을 돕는다. 그래야만 내가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도우는 대상이 남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으로 돕는다. 

이러한 개념은 이타주의자의 남을 돕는 마음보다 덜 숭고하지 않다. 내가 나를 돕는 데에 생색을 낼 필요가 없고 내가 나를 도울 때에는 나에게 하듯이 한다. 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 마음 같은 거는 갖지 않는다.

심장이 펌프질을 하면서 모든 다른 장기에게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나를 위하여 남에게 펌프질을 하여 나누어 주고 함께 협력하게 된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나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이 하는 안내 맨트 중에 "산소 호흡기를 아이보다 어른(보호자)이 먼저 착용해 주세요"하는 내용이 있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나부터 안전해야 된다는 내용이다. 내가 돌봐야 할 아이가 걱정되어 아이에게 먼저 산소호흡기를 착용해 주려다 시간을 빼앗기면 아이와 어른 모두 큰 일을 당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비행기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을 도와주려면 자신이 먼저 건강해야 한다. 나의 몸은 죽어가면서도 남을 돕는 이야기가 우리 마음을 울리곤 한다. 이타주의의 실천적 사상가라면 나름 이해하고 동조할 수도 있겠지만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시민의 이러한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남을 돕기 위해서 나의 상태를 악화시키면 또 다른 남에게 나는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게 된다. 그것은 도움을 받는 누군가에게는 이타(利他)적 행위였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는 해타(害他)적 행위가 될 수 있다. 남을 돕고자 하는 행위가 남에게 부담을 주고 해를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현명한 이타주의자는 남을 돕기 위하여 나를 챙겨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하여 남을 돕고 남을 위하여 나를 챙긴다. 

*본 기사는 사례뉴스 안선영 필진기자가 쓴 컬럼입니다. 안선영 필진기자는 (주)에스엠월드써미트 대표로 25여 년간 '대한민국 재활케어 대표쇼핑몰'을 경영하고 있으며, 환갑을 1년여 앞두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입니다. 브런치스토리에 필명 '라트'로 활동하며 에세이,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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