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미국 전역에 생중계 된 4분 간의 연설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의 부당함을 지적한 CM펑크
독선적 경영이 불러온 WWE의 시청률 하락
한국의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도입이 중요한 이유

빈스 맥맨 WWE 회장과 도널드 트럼프 (출처 :WWE)
빈스 맥맨 WWE 회장과 도널드 트럼프 (출처 :WWE)

존 시나, 언더테이커, ‘더 락’ 드웨인 존슨.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이들은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t)라 불리는 미국 프로레슬링 업계의 스타들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흥행에 성공한 WWE를 뒤흔든 사건이 2011년 6월 27일 발생했다.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던 WWE RAW 프로그램에서, CM펑크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가 업계의 부조리한 관행과 회사의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생방송에서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다. 생방송이 시작될 때 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선수가 4분 간에 걸친 연설 후에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고,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WWE RAW에서 연설하는 CM 펑크 (출처:유튜브 캡쳐)
WWE RAW에서 연설하는 CM 펑크 (출처:유튜브 캡쳐)

"난 이 회사에서 빈스 맥맨 회장의 눈 안에 들어 기회를 얻어보려고 별 짓을 다했어.

그리고 결국엔 깨달았지. 이 바닥에서 성공하는 길은 그저 회장님 비위에 맞춰 아첨이나 떠는 것이라는 걸.

나는 날이면 날마다 몸을 혹사시켜 가면서 6년 넘게 이 바닥에서 내가 최고라는 것을 증명해 왔어. 그런데 성공의 몫을 가져가는 놈들은 하루하루 최고임을 증명한 내가 아니라 존 시나, 더 락, 헐크 호건 같이 회장 옆에서 아부나 하는 예스맨들이라고!

나는 365일 중에 300일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회사를 위해 헌신해 왔단 말이야.....(중략) 그럼에도 회장의 지시가 없었다는 이유로 나는 판매용 상품에도 그려져 있지 않고, 프로그램의 홍보 영상에 등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USA 네트워크 쇼에도 나오지 않아. 심지어 난 레슬매니아 포스터에도 없고!

할리우드에서 영화나 찍다가 1년에 한 번이나 회사에 나올까 말까 한 드웨인 존슨은 가장 성대한 무대인 레슬매니아의 메인이벤트를 장식하는데, 365일 내내 고생하는 내가 그 무대에 서지 못한다는게 날 짜증나게 한다고!

아마도 이 회사는 빈스 맥맨이 뒈진 후에야 잘 굴러 가겠지!

상부의 지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프로레슬링 업계

WWE 레슬매니아 33 (출처 : WWE 홈페이지)
WWE 레슬매니아 33 (출처 : WWE 홈페이지)

프로 레슬링은 ‘경쟁 스포츠’이지만, 미리 각본이 짜여진(scripted)된 스포츠다. 올림픽이나 축구 경기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선수가 링 위에서 몸을 부딪히고 구른다. 경기 와중에 뇌진탕을 비롯한 수많은 부상을 겪는 선수도 많다.

하지만 승패는 각본진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영화, 드라마와 같이 연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산업이다. 회장과 임원진, 각본진이 시합의 향방과 승패를 결정하고, 두 선수 간의 대립 과정을 연출한다.

어떤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전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되는지는 상부가 결정하는 것이다. 선수가 얼마나 노력하는 지에 상관없이 말이다.

상부의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선수들

선수에게 지시를 내리는 빈스 맥맨 WWE 회장 (출처: NETRAL NEWS)
선수에게 지시를 내리는 빈스 맥맨 WWE 회장 (출처: NETRAL NEWS)

경기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회장과 임원진, 각본진이기 때문에 선수들은 “이렇게 하면 조금 더 관중의 시선을 끌고 재밌는 경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라는 의견을 표출하지 못했다.

WWE는 극도로 수직적인 구조를 가진 기업이었고, 실제로 여성 선수들은 선정적인 방송을 강요당했다. 또한 남성 선수들은 몸이 망가질 만큼의 폭력적인 연출을 강요받아왔다. 상부의 지시가 불합리한 결정이어도 봉급을 지급받기 위해 선수들은 희생을 감내해 왔던 것이다.

CM펑크는 자신이 포도상구균 감염과 뇌진탕 증세를 겪는 와중에도 선수들을 동물 취급하며 서커스 단에 투입하듯이 경기를 치르게 하는 회사의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시스템을 향한 불만을 표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팬들과 소통하지 않는 임원진

WWE 슈퍼스타 존 시나 (출처 : WWE 유튜브 캡쳐)
WWE 슈퍼스타 존 시나 (출처 : WWE 유튜브 캡쳐)

2010년대 초반, 존 시나가 WWE의 얼굴이 되면서 임원진과 각본진은 모든 경기의 메인이벤트에 그를 투입했다. 또한 다른 선수를 일부러 패배시키며 존 시나를 위해 희생하도록 강요했다. 레슬링을 잘하냐, 못하냐에 따라 성과를 구분짓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선수만을 키워온 것이다.

팬들은 이에 대해 피로감을 느꼈고, 실제로 존 시나에 대한 푸쉬(Push, 선수에게 승리를 부여하여 서열상 높은 위치로 올리는 것)를 중단하라고 요구해 왔다. 하지만 빈스 맥맨 회장과 각본진은 팬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고, 이는 많은 팬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독선적 경영이 불러온 WWE의 심각한 시청률 저하

연도별 WWE의 1분기 시청률 추이 (출처:Reddit)
연도별 WWE의 1분기 시청률 추이 (출처:Reddit)

WWE는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과 더 락(드웨인 존슨)이 스타로 떠오르던 90년대 후반 이후로 시청률의 침체를 겪어 왔다. 그나마 2004~5년에 존 시나와 데이브 바티스타라는 신인을 발굴해 재미를 봤지만, 회장 빈스 맥맨의 끝없는 빅맨(덩치가 큰 선수)사랑으로 인해 팬들의 외면을 받아 왔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강인한 외형을 가진 선수끼리 치고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스토리다. 팬들은 끊임없이 적절한 각본과 그에 맞는 선수 발굴을 요구해 왔지만, WWE의 각본진은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과거의 성공 사례에 발이 묶여, 계속해서 덩치가 큰 선수만을 종용해왔다. 

팬들과 선수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결과로, WWE의 시청률은 최근까지 끝없는 하락을 거듭하고 있다. 회장과 임원진의 독단적 경영과 불통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민주적 의사결정의 가능성을 높이는 노동이사제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를 추진하는 국회의원 (출처:이코노미스트)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를 추진하는 국회의원 (출처:이코노미스트)

WWE의 사례에서 보듯, 기업 이사진이 사원과 고객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무한한 권력을 휘두를 경우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생산성의 감소, 고객 만족도 저하, 노동 의욕 감소 등이 그 예다.

이 상황에서,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는 임원진의 독선적 경영을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장치다. 노동이사제는 노동자 대표가 기업 이사회에 참여해 의견을 제시하고, 기관 내부에서 감시와 견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고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유럽에서 먼저 제도화된 노사 공동결정제도로, 독일에서 가장 먼저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월 11일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 등의 내용을 담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131개 공공기관에서의 노동자 대표의 경영권 참여가 공식화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131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은 이르면 오는 7월부터 노동자 대표가 추천하거나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은 비상임이사 1명을 이사회에 참여시켜야 한다. 

노동이사제가 기관의 방만한 경영을 방지할 수 있을까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출처 : 조선비즈)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출처 : 조선비즈)

노동계는 공공부문 노동이사제의 도입이 기관의 지배구조 개선과 합리적인 절차에 의한 민주적 의사결정의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로 공공기관 경영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이 높아져 경영 투명성을 높일 것이고, 낙하산 인사, 자의적 경영 등 불합리한 업무 과정을 줄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노사 간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경영진에게 노동자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노동자의 관점이 반영돼 생산성 개선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  노동이사의 참여로 노사 간 정보의 비대칭성이 완화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노동이사제는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매년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 (출처 : 매일경제)
매년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 (출처 : 매일경제)

CM펑크는 자신을 'The voice of the voiceless'라 표현했다. 그동안 회사에 불만이 있었지만, 불만을 표출하지 못했던 자들을 대변해서 자신이 나섰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는 그동안 방만 경영, 수직적 의사결정의 분위기로 비판받아온 각종 준정부기관, 공공기관의 비민주적 행태를 개선하고 말 없이 묵묵히 일하던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제도다.  

회사에 불만이 있고,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묵묵히 일만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노동 현장의 반응을 경영진에 전달하기 위해 노동이사제는 꼭 필요한 제도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민국의 경제화를 이끈 것은 소수의 지도자가 아니라 묵묵히 일한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었듯이, 회사를 이끄는 것은 소수의 경영진이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들이다. 그동안 노동자를 억압하고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은 경영자들에게 CM펑크의 연설은 큰 울림을 준다.

"Do I have everybody's attention now?"

*본 기사는 학생기자의 글로 본보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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