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나만의 단어를 만드는 일
단어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만든다

 글 쓰기는 자기만의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자기만의 언어라 해서 나르시시즘에 빠져야 한다든지 오타쿠 적인 기질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만지고 물고 뜯고 감각하며 느끼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하고 싶을 뿐. 표현만 제대로 해도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당신을 대하는 주변의 시선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뜻밖의 속내음을 들었다. 자신의 딸이 다른 또래보다 말이 많이 늦다고 했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각 연령별로 구사하는 단어수가 있는데 자신의 딸은 그 기준에 반에 반 정도밖에 미치지 못한다 했다. 의사의 그 말을 듣고는 그는 무척이나 낙담했다.

나는 아이마다 차이가 있을 것인데, 그런 기준 자체가 잘 못된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차이를 떠나 이제 곧 어린이집을 가야 하는데 말을 제대로 못 하니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알 수 없다며 한숨짓는 것이 아닌가.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듯 했다.

(사진출처: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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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수심 가득한 사람으로 만든 데에는 그 배경이 있다. 일부 보육교사들이 말 못 하는 아이들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이 알려진 것이다.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몰상식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지만, 전국에서 경쟁하듯 비슷한 사례들이 올라왔다. 그도 그런 뉴스를 보고는 남일 같지 않다며 걱정했을 테지.

나는 찝찝한 마음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 단어에 대한 기준을 찾아봤다. 연령별 구사하는 단어의 기준이 정말로 있었다. 만 나이 기준으로 1년은 3 단어, 2년은 272 단어, 3년은 896 단어, 5년은 2072 단어, 6년은 2562 단어를 안다고 했다. 아이들 마다 편차야 있겠지만 이런 기준이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아이들의 생각이 확장되는 만큼 사용하는 단어 수가 늘어나는 듯 보였다. 아니면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늘어났기에 그만큼 더 감각하고 그에 걸맞은 뉴런의 증식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2500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7살 아이와 900 단어를 사용하는 4살 아이가 맞붙으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육체적인 힘도 힘이겠지만, 주장에 근거를 뒷받침하는 단어의 쓰임에서부터 차이가 날 것이다. 논리의 차이만으로도 충분히 승패가 판가름 날 것 같았다. 그러면 힘을 써야 하는 상황까지 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진출처: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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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어는 하나의 감각을 담당한다. 그 단어는 동사가 될 수도 있고 형용사나 명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느낀 점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로또의 숫자는 46개다. 해당 숫자만 가지고 조합을 만들어 1등이 될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라 한다. 하물며 수천 수만 개의 단어로 조합하는 1등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상상도 할 수 없을법한 수치임이 분명하다. 그냥 실현 불가능할 정도의 확률이라 봐야겠지.

자신의 생각 표현 하기도 로또의 확률 계산법과 그 결은 같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 감각 하나하나를 모두 맞춰가며 정확하게 일치하는 단어는 세상에 없다. 우울함, 두려움, 희열, 증오, 기쁨, 설렘, 기대감 등 수도 없이 많은 단어들이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느낌을 나열한 영수증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거다.

글쓰기는 해변가에 흩어진 특정 모래알을 찾아 헤매는 행위 같다. 절대로 찾지 못할 것 같아 보여도 쓴다라는 동사 자체에 그 의미가 있다. 단지 지금 내가 느끼는 우울함이 어디서 온 것이고, 어떤 감정으로 변모하며, 더 느끼고 싶거나 느끼고 싶지 않음을 분명히 기록하는 활동이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우리의 감정선을 따라 글도 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글 쓰는 것을 어려워한다. 아니면 싫어할 수도 있다. 읽는 것도 버거운데 쓰기를 왜 하냐며 투덜댄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글 속에 우리가 산다. 초단위로 쏟아지는 뉴스와, SNS 게시글, 그리고 단톡방 채팅까지. 내가 쓰는 글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왠지 힘이 빠진다.

(사진출처: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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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세상에 글이 넘쳐날수록, 자신만의 언어가 더 필요하다. 좋아요를 유발하는 글, 돈을 부르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단어를 뒤적이며 그중에서 나올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강한 자도 많지만 약한 자도 많다. 가만히 있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무시나 불이익을 당하곤 한다.

말해봐야 무시만 당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경험에서 오는 귀납법의 오류에 불과하다. 그들은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깐난쟁이 아이처럼 말을 못 해서? 아니면 구사할 수 있는 단어수가 적어서?

어쩌면 자신만의 단어를 가지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힘들면 힘들다. 어려우면 어렵다로 퉁치는 말이 아닌,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인지 찾아보고 따져보고 물어보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지도. 계속 밖으로 내 생각이 전달되어야 세상 속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존재에 대한 포만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글은 전업 작가나, 교수, 의사, 변호사 분석가만이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인 나도 쓸 수 있고, 소방관, 경찰관, 청소부, 용접공, 주부, 학생 모두가 평등하게 쓸 수 있는 게 글이다.

(사진출처: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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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가 마침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해서 글로 써주면 다행이고, 아니면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고 살아야 하는 수동적인 삶은 더 이상 살지 말았으면 한다.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자. 지금 자신이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동사 몇 개로 뭉쳐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쉽게 생각하는 만큼 감각과 생각은 닫히고 생각의 근력 또한 퇴화될 수밖에 없다.

말하고 싶은 생각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그 단면을 잘라 조목조목 글로 옮겨 보자. 단어 하나가 A4용지 한 장이면 어떻고 두장이면 어떠랴. 그 글이 초등학생이 쓰는 그림일기 같아도 상관없다. 어떤 기분인지도 모른 채 자신만 탓하며 사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더 나으니까.

남들이 가지지 못한 마음의 감각을 쟁여 두는 것만큼 삶의 윤곽을 뚜렷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어 차곡차곡 채워보자. 표현력의 풍부는 마음의 풍요로 이어질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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