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지난한 시간에 나를 위로해주고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준 것이 있다면 뮤지컬 작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뮤지컬에는 인생이 있고 사연이 있는 스토리가 있고 이룰 수 없는 꿈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 보면 스페인의 한 지하 감옥에 신성 모독죄로 잡혀 온 사상범인 '세르반테스'가 동료 죄인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위협에 직면하여서 한 사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으로 시작을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골 지주였던 '알론조 키하나'는 평생 책을 너무나 많이 읽고 썩을 대로 썩어버린 세상에 대하여 고민을 너무 많이 하시다가, 어느 날 그만 머리가 텅 비게 된 듯 제정신 같은 건 놓아버리시고 기사가 되어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더 이상 평범한 '알론조 키하나'가 아니라 ’무적의 기사’ 라만차의 '돈키호테'로 말이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끼는 세상에서는 단연코 스스로 천하무적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한(이라고 쓰고 겁을 상실했다고 읽는다) 전과(戰果)들을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 감각이 떨어진 그의 과대망상증은 정신병자의 기행과도 같아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무적의 기사'라는 호칭 대신에 ’슬픈 수염의 기사'라고 부른다.

미친 수염이 아니라 슬픈 수염이 된 이유는 보기에 딱하다는 그런 말이다. 그가 슬퍼 보이는 이유는 그의 뜻을 이해하고 그의 투쟁에 동조하는 세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몸종 산쵸는 오갈 데 없는 기회주의자로 보이고 사랑하는 애마 로시난테는 너무 늙어서 힘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걱정하는데 정작 본인은 태평하다. 현실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현상에 대해 나름 소신 있게 설명하고 대처를 한다. 이를 가리켜 과대망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 역시 사업이 망하기 전에는 과대망상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전쟁 같은 다툼으로 인해 고민이 지나치게 많았다. 심적으로 하도 시달리다 보니까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머리가 텅 비게 된 듯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 숨었다. 하울이 움직이는 성안에서 자신만의 판타지를 만들어 가며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 출처: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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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1막의 마지막에 과대망상자의 노래가 나온다. 그 유명한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이란 넘버가 그것이다. 판타지에 취해 있는 사람에게 그가 꿈꾸고 이루려고 하는 일은 불가능할 수밖에는 없다.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무모한 환상에 잠깐 현혹되어 마음이 흔들렸던 주변 사람들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슬슬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돈키호테가 '둘시네아' 공주라고 떠받들던 거리의 여자 '알돈자'도 자신을 짓밟고 간 남자 중에 당신이 가장 잔인하다고 소리치고야 만다. 세르반테스의 변호는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공연의 마지막 2막의 끝 곡에서 이 노래가 다시 나올 때는 감옥 안의 모든 죄수가 함께 부르며 심판대로 향하는 세르반테스를 뜨겁게 배웅하며 막을 내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돈키호테에게 일어난 것일까?

알론조 키하나 지주의 기행을 소문으로 듣게 된 지인들은 그를 걱정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여조카 안토니아의 약혼자 닥터 까라스코는 ’거울의 기사'를 보내 자칭 '무적의 기사'를 상대하게 된다. 까라스코의 직업은 의사로서 기본적으로 과학자였다. 과학의 냉정한 객관성으로 판타지의 허무맹랑한 주관성을 상대하게 만든 것이다.

공연에서 보면 이 장면에서 대여섯 명의 배우들이 거울로 만든 방패를 들고 돈키호테 앞에 서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힘없이 쓰러지는 알론조 키하나의 모습이 나온다. 천하무적의 돈키호테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공연을 볼 때마다 이 장면에서 폭풍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사진 출처: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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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망상 증상이 있는 사람이 사업을 하면 벤처 기업을 만들어서 한다. 첫 아이가 나오던 해에 나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무모하게 도전을 시작했다. 운이 좋아서 승승장구하다가 한 방에 무너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거울의 기사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가슴을 치며 꺽꺽거리며 울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억울함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쓰러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온몸이 마비되어 시작한 명상과 요가를 통해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공연에서 돈키호테가 몸져누웠던 것처럼 오랜 시간을 침잠하며 지내게 되었다.

병을 얻어 쉬고 있는 돈키호테의 집으로 알돈자가 찾아온다. 그녀는 돈키호테에게 질문을 한다. 돈키호테가 그녀 곁을 떠나게 된 이후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설명이 나오지는 않는다. 단지 그녀는 그에게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돈키호테는 비로소 침상에서 일어나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변호를 끝내게 된다. 감옥 안에 있던 모든 죄수들도 세르반테스가 들려준 이야기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감동을 받아 그를 뜨거운 마음으로 보내준다. 

나는 사업이 망하고 십 년도 넘는 시간을 나도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경거망동하지 않고 쥐죽은듯이 지냈다. 보잘것없는 프리랜서로 근근이 지내면서 아이들을 보살피고 마음을 닦으며 지냈던 것 같다. 그토록 지난한 시간에 나를 위로해주고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준 것이 있다면 뮤지컬 작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뮤지컬에는 인생이 있고 사연이 있는 스토리가 있고 이룰 수 없는 꿈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출처: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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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사례뉴스 필진기자 에세이스트 김쾌대 작가가 쓴 칼럼입니다. 김쾌대 작가는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해외 관련 업무를 하다가, 캐릭터 라이센싱과 IT 웹 개발 벤처회사를 창업해서 운영했습니다. 사업이 망한 이후 콘텐츠 마케팅 기획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나이 오십에 접어들면서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골든아워를 놓치지 않아 죽지 않고 생환했습니다.

이후 글 쓰는 전업작가로 전향하여 시니어를 위한 '치유와 통찰의 글쓰기'를 지향하며 현재 만학도를 위한 ‘진형중고등학교’(서울 소재)에서 글쓰기 동아리반을 이끌며 기회가 닿은 대로 지자체 특강이나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생각보다 잘 지내는 중입니다'와 '컵라면이 익어가는 시간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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